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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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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서 활동한 비밀인물
2015년 01월 25일 09시 48분  조회:7291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서 활동한 비밀인물

 
(번역)




 
 
1934년에 홍군을 포위토벌하기 위해 장개석(蒋介石)은 직접 사천, 운남, 귀주에 가서 장병들을 위문하기로 결정했다. 진립부(陈立夫)는 뜻밖의 화를 방지하기 위해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인물(替身)을 선택하여 동행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립부가 장개석을 닮은 몇명을 추천했지만 장개석은 모두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나중에 장개석은 결의형제 하운(何云)이 생각났다.
1880년에 절강성에서 출생한 하운은 장개석보다 7살 년상이였다. 하운은 상해에서 록영병(绿营兵)으로 있을 때 오장(伍长)과 함께 물건을 사러 거리에 나간적이 있었다. 그때 오장이 담배가게에서 권연을 가지고도 돈을 주지 않았다. 가게주인이 돈을 달라고 하자 오장은 오히려 제쪽에서 화를 내면서 주인을 마구 때렸다. 하운은 보다못해 오장을 말리면서 돈을 주라고 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장개석이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장개석은 하운이 자기와 똑같이 생긴것을 보고 놀랐다. 또 하운이 부패한 청정부를 증오하는것을 보고 그를 쓸모 있는 인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하운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하운은 장개석의 소개로 동맹회에 가입했고 후에 장개석의 부관으로 되였다.
진립부가 하운의 사진을 보니 과연 생김새가 장개석과 비슷했다. 진립부는 즉시 차를 항주에 보내 하운을 데려오게 했다.
하운이 남경에 도착한 그날밤에 대통령부에서 연회가 있었다. 연회석에서 장개석과 하운은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운은 장개석의 은혜에 몹시 감격해하고있었다.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직을 맡은후 전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학교문에도 다녀보지 못한 하운을 황포군관학교 제1기학원으로 받아들였다. 또 북벌군이 항주를 공격한후 장개석은 하운을 항주시공안국 국장 겸 절강성군사청 부청장으로 임명했다.
식사가 끝난후 진립부는 하운을 밀실로 안내했다. 진립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번에 당신을 남경에 청해온것은 한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귀주의 정황은 매우 복잡하여 장위원장의 안전을 보장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위원장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 일을 맡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선택한것은 장위원장과 진주임이 저를 믿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꼭 장위원장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운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진립부는 하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장위원장을 대신하려면 생김새가 흡사해야할뿐만아니라 본질적인 면도 비슷해야 합니다. 크게는 군정대사를 처리하는데서부터 작게는 음식습관에 이르까지 당신은 반드시 위원장님과 똑같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조그마한 허점도 보아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후부터 하운은 시시각각 장개석의 곁에 붙어서서 장개석의 하나하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대로 따라했다. 화를 내는 행동과 웃는 모습까지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밤이면 밀실에 돌아가 낮아보았던 장개석의 말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련습했다.
장개석을 모방하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다. 하운의 고향은 절강성 서남부였기때문에 습관과 발음이 장개석과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장개석은 고기를 적게 먹고 고기를 먹을 때 반드시 생선이 있어야 했지만 하운은 고기와 남새를 구분하지 않고 많이 먹고 빨리 먹었다. 하지만 하운은 장개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련습했다.
1934년 12월초에 장개석은 중산릉에서 위병대를 검열할 때 일부러 하운을 내보내여 효과를 시험해보기로 결정했다.
일본식 짧은 수염을 기른 하운은 가슴에 훈장과 메달을 가득 단 특급상장군복을 입은후 검은색외투를 걸치고 위병대앞에 나타났다.
위병대는 주석대를 지날 때 일제히 경례를 군례를 올리면서 “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하고 높이 웨쳤다. “장개석”은 주석대우에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사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서 “형제들, 안녕하십니까?”하고 소리쳤다.
검열이 결속된후 “장개석”은 강의를 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주석대의 요원들과 일일히 악수를 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송미령이 걸어나오며 매우 기쁜 심정으로 “장개석”의 손을 잡고 “친애하는이, 위병대의 장비와 정신상태가 모두 좋군요.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군요”하고 말했다. “장개석”은 대번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후에야 그는 “부인은 어떤 고견을 가지고있는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송미령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친애하는이, 설마 보아내지 못한건 아니겠지요?”
“장개석”이 머리를 가로 젖자 송미령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두 참,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더니…됐어요. 돌아가 다시 말해주지요.”
송미령은 “장개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장개석”은 고분고분 따라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진립부는 급해났다. 만약 “장개석”이 정말로 송미령과 함께 승용차에 올라 대통령부로 직통한다면 일이 매우 시끄럽게 될판이였다. 진립부는 급히 “장개석”에게 눈짓을 했다. 그제야 “장개석”은 급히 멈춰서서 “부인, 난 먼저 화장실에 가야겠소”하고 말했다. “장개석”이 화장실쪽으로 걸어가자 그제야 여러 군정요인들은 주석대에서 내려와 송미령을 보고 인사했다. 진립부는 몰래 진땀을 흘리다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가짜장개석 하운이 겨우 사람들을 속여넘겼던것이다.
하운의 성공적인 연기에 매우 만족을 느낀 장개석은 장기적으로 그를 시종실에 남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하운은 장개석을 대신해 많은 공개장소에 나타났다. 기념식이나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부분 하운이 장개석을 대신하여 활동했다.
1935년에 귀주로 갔을 때 처음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부 연회에만 참석했다. 일은 장개석이 비밀리에 비행기를 타고 곤명으로 날아온후에 생겼다. 귀주에서 장개석을 대신하여 활동하던 하운은  자기 마음대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장수를 파견하였다. 그때문에 병력이 부족되여 무의식중에 홍군에게 한갈래의 길을 내주게 되였다. 홍군이 봉쇄에서 벗어나자 장개석은 대노했다. 하운은 남경에 돌아온후 진립부의 요청을 받았다. 진립부는 하운을 당산汤山아래에 있는 별방에 연금시켰다.
하운은 별장에서 하루를 일년같이 보내면서 항주에 있는 안해와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그 시기의 장개석은 공산당포위토벌에 혈안이 되여 그를 대신하여 천군만마를 지휘했던 결의형제를 한쪽에 버려두었다. 그러다가 1935년 11월에 열린 국민당6중전회에서 왕정위에게 총알이 날아오자 장개석은 위험한 장소에서 자신을 대신할 하운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나 송미령이 견결히 반대했다. 하운이 장개석과 너무 똑같았기에 송미령은 늘 진짜 장개석과 가짜 장개석을 알아보지 못한데서 불필요한 시끄러움이 생겼기때문이다. 게다가 하운은 문화수준이 낮아 여러가지 소질이 차하였고 사투리를 섞어서 말했기에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합격된 인물이 아니였다. 장개석은 하운에게서 절대로 비밀을 루설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은후 하운의 자유를 회복해주었다.
1937년 5월에 장개석은 하운에게 소장계급을 수여하고 국민정부군사참의원 참의직을 맡겼다. 하운에 남경에 출근하지 않고 항주에 앉아서 진립부의 보살핌으로 높은 로임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남경, 상해, 항주를 점령하자 처지가 어렵게 된 하운은 장개석을 찾아 중경으로 갔다. 장개석은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명령을 기다리고있으라고 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하운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고 항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시기에 장개석은 내전을 하느라고 바삐 보낸데다가 자신을 반대하던 군벌들도 하나하나 굴복시켰기에 위험한 장소에 대신 나갈 인물이 수요되지 않았다. 생활형편이 어려웠던 하운은 여러번이나 장개석과 진립부에게 편지를 써서 공직을 회복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줄곧 회답을 받지 못했다. 하운은 병상에서 “내가 ‘위원장’을 대신해주었지만 위원장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구나!”하고 탄식했다. 1947년 6월에 장개석은 자신에게 충성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애장들에게 계급을 수여했다. 그때에야 장개석은 갑자기 하운이 생각나서 군사위원회에 부탁해서 다시 하운에게 소장계급을 수여하게 했다. 하운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병세가 중해서 말도 할수 없었다. 하운은 힘들게 한번 웃었을뿐이였다. 1947년 9월에 하운은 병으로 고향 건덕현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6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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